‘궁술’은 우리의 전통활쏘기 용어가 아니다!

1. 들어가는 말

‘활쏘기’, ‘궁도’, ‘궁술’, ‘국궁’이라고 부르는 용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것 같다. 작년 11월 말에 열린 ‘궁도역사고증 학술세미나’와 ‘궁도진흥법 공청회’에서 ‘궁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단어이기에, 절대 쓰지 말아야할 용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道’자가 붙은 무술은 거의 다 일본의 무술이거나 일본 무술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유도, 검도, 합기도, 공수도 등 무수히 많은 일본 무술에 道자가 붙는다고 말하며, 궁도도 그러한 일제의 잔재라고 말한다. 일부는 맞지만,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궁도’ 뿐만 아니라 ‘궁술’이란 용어도 일본에서 차용한 용어라는 사실을 안다면 ‘궁도’란 용어를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조금 의아해 할 것이다. 필자는 몇편에 나누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궁술’, ‘국궁’, 궁도, 활쏘기 등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있다. 우선 ‘궁술’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2. 일본인에 의한 궁술이란 용어의 도입

1876년 조선 왕조가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 근대화 이전에는 궁술이란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그리고 일반 조선시대의 문집 등 어디에도 궁술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림 1 「조선잡기(朝鮮雜記)」에 보이는 궁술(弓術)

일본인들이 사용한 ‘궁술’이란 말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즈음이었다. 1893년(메이지 26) 일본에서 창간된 일간신문 『이육신보(二六新報)』의 1894년 5월 8일자의 「조선잡기(朝鮮雜記)」란 글에서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사람이 조선의 무예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의 활쏘기를 ‘궁술(弓術)’이라고 언급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나라(조선)의 무예중, 현재 존재하는 것은 단지 궁술뿐으로, 칼, 창, 검 등은 없지만, 평일에 그 연습하는 것도 있고, 활은 짧은 활(半弓)로 하고 화살의 길이는 우리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과녁은 한 칸 사방뿐인 판에 '본보 128호의 조선잡기 중에 게재한 것과 같은 것'을 쓰고, 백보 이상의 거리를 재서 그것을 쏘게 하고, 매년 시험을 쳐서 잘 명중시키는 사람은, 선달(先達)이란 칭호를 얻을 수도 있다. 또 철포의 사격도 있지만 활처럼 유행하지도 않으며 활의 유행은 반드시 승부를 결정하는 하나의 도박이므로, 그 나라 사람들의 취향에 맡겨야 할 것이다."

당시 이 글이 일반인들이 얼마나 읽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림 2 통감부문서 10권에 보이는 고종의 ‘일과규정’

또 1904년부터 1910년에 생성된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라는 책이 간행되었는데, 여기에서 ‘대황제 계하의 일과규정(大皇帝陛下의 日課規定)’이란 항목에 궁술이란 단어가 보인다.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중 제 10권에 있는데, 이 책 속에서 고종의 일과를 논하면서 제4조에 “운동은 산보, 유희, 마술, ‘궁술(弓術)’등 신체를 건강케고 정신을 상쾌케것으로 홈”이란 규정을 두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이 내정간섭을 하는 와중에 자신들의 개념인 궁술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고종의 활동을 감시하며 기록한 것이다. 또한 운동설비로 궁술장(弓術場) 궁(弓) 화살(箭) 과녁(的) 등을 표기하였다. 『통감부문서』는 주한일본공사관·영사관과 일본 외무성, 각국 주재일본 공사관·영사관과 일본 외무성 등이 주고받은 비밀 전보·공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 경시청·헌병대의 비밀문서도 포함되어 있는 한국 근대사 연구의 기본적인 자료이다. 따라서 이 자료 역시 한국사람들이 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1909년 중추원 조사자료인 『융희3년 한국관습조사보고서 – 평북 편(隆熙三年 韓國慣習調査報告書 - 平北 篇)』 ‘제31. 公有에 관한 관습은 어떠한가’란 글에서 사계(射契)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제5항에 “射契 : 弓術射的을 목적으로 했지만, 지금은 없다.”라고 하였고, 궁술도 아니고, ‘궁술사(弓術射)’, 즉 ‘궁술활쏘기’라고 표현하였다.

그림 3 부산일보 선인궁술대회(鮮人弓術大會)

또 일본인들의 신문인 『부산일보(釜山日報)』 1915년 6월 23일자에 “〈각지통신-진주〉 ‘선인궁술대회[鮮人弓術大會]”란 제목으로 조선인들의 궁술대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인궁술대회[鮮人弓術大會]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20일 일요일을 맞아 당지 조선인들이 조직한 궁술조(弓術組)는 남강 기슭 밤숲에서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경기자는 50여명에 이르렀고, 두조로 나누어 한(韓)군수가 한편의 우두머리인 기두(旗頭)가 되고, 다른 한편은 서진옥(徐珍玉)이 우두머리가 되어 활쏘기시합(競射)을 겨루었다.”
그림 4 1923년 경복궁 신무문내 궁술대회(大正十二年 景福宮神武門內 朝鮮弓術大會 射)

그리고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 조사자료에 “1923년 경복궁 신무문내 궁술대회 활쏘기”라는 사진자료가 있다. 이 사진자료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원고지 위에 사진을 붙이고, ‘大正十二年 景福宮神武門內 朝鮮弓術大會 射’라고 펜클씨로 쓴 것으로 7명의 궁사가 경복궁 신무문안에서 궁술대회에서 활을 내고 있는 모습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신무문은 바로 지금의 청와대 앞에 있는 경복궁의 북문이다. 이후로 전국각지의 궁술대회 소식이 전해진다.

3.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한 궁술이란 용어의 도입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궁술이란 단어가 쓰여진 것은 1907년이다. 190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이 결성한 친목단체·계몽단체인 태극학회에서 발간한 『태극학보(太極學報)』 제8호(1907년)에 박상락의 「위생문답」이란 글 속에서 궁술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태극학보』는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1,000부에서 2,000부까지 배포되었다. 체육법으로 궁술이란 종목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그림 5 태극학보, 위생문답 속 ‘궁술’

(문) 체육법은 어떻게 하는지요. (답) 땅의 기운(地靈: 지령)으로된 체격발육은 만 이십세만 되면 근본적 발달은 대개 마치게 됨은 만인이 모두 아는 바라. 그런 까닭으로 사회경쟁장속의 월계관을 얻고자 하는 청년은 소년시대에 적당한 체육법과 및 운동에 게으르지 말 것이오 그 부모도 열심히 장려함이 가하며 기그 체육법의 종류는 왼쪽과 같음. 병식체조, 유술, 검술, 베이스볼, 조정, 궁술(弓術), 기계체조, 이른 아침의 신선공기 호흡운동, 기술(騎術), 테니스, 여름철 해수욕, 일생 냉수목욕 등 각종 운동을 적당이 힘써 행함이 가장 좋음

그림 6 황성신문 궁술회개최

이처럼 서양에서 도입된 근대의 체육법을 소개하는 내용 속에 체육법의 종류로 체조, 유술, 검술, 베이스볼, 조정 그리고 ‘궁술’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태극학보』는 계몽적인 잡지로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책자는 아니지만 지식층에서 이것을 읽어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황성신문』 1908년 6월 6일자에서 "궁술회개 명일에 경성야초제정대궁술장에서 궁술대회를 연다더라(弓術會開 明日에 京城若草齊藤井大弓塲에셔 弓術大會를 開다더라)”라는 기사가 보인다. 제목에서는 ‘궁술회을 연다(開)‘고 하였고, 내용에서는 ’궁술대회‘를 개최한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이 가장 처음 보도된 ‘궁술대회’ 기록일 것이다. 『황성신문』은 1898년(고종 35) 창간된 민간신문으로 국한문혼용체로 발행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부터 궁술(弓術)’이란 단어가 일반인들이 접하는 신문 등에 소개되어 알려지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부산일보』 1915년 7월 24일자에서 “구(舊) 마산 사정[射亭]의 궁술회[弓術會]” 그리고 1915년 9월 2일자에 ”〈각지통신-울산〉 울산궁술회[弓術會]의 성립“ 등 궁술대회 소식이 전해졌다. 아마도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본어를 배운 한국인들이 궁술이란 단어를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부산일보』에서는 1915년부터 1941년까지 총 31건의 궁술대회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도 1918년 5월 12일자에 ”동래 궁술대회(東萊弓術大會)“를 비롯한 다양한 궁술대회를 소개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1920년에 창설되는데, 특히 『동아일보』에서는 수많은 전국의 궁술대회 소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림 7 강경궁술대회개최

『동아일보』에서 제일 처음 나온 기사는 1920년 4월 22일 “강경궁술회개최(江景弓術會開催)”라는 제하에 “강경 유지 여러 사람은 각지 유지를 초청하여 다음 23일로부터 24일 양일간 강경 덕유정에서 궁술회를 개최하리라 하더라(강경)”라는 소식이다. 이후 1921년 5월 22일 “전주궁술대회개최(全州弓術大會開催)”라는 기사가 나오고, 그 다음은 5월 31일 “벽성청호궁술대회개(碧城靑湖弓術大會開催)” 6월 1일은 인천편사대회성황(仁川便射大會盛況), 7월 3일에는 “경성각희 및 궁술회(鏡城脚戱及弓術會)”, 10월 18일 “논산편사궁술회 성황 (강경)(論山便射弓術會盛況(江景)”, 10월 23일 “통영궁술회성황(統營弓術會盛況)” 등 1921년에만 모두 8건의 궁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로 일반대중들에게도 ‘궁술’과 ‘궁술대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기생궁술대회’가 경복궁에서 궁술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날 입장객이 22,458명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기생들은 궁술대회 참가를 위해 경성, 천안, 서대문 대궐 안 황학정 등에서 매일 연습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써 궁술이란 용어는 일반에게까지 통용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조선궁술대회’라는 명칭은 192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는데, 전국각지에서 ‘전조선’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전조선궁술대회는 1928년에 열리게 된다. 『동아일보』 주관으로 황학정에서 7월 13일부터 열렸다. 이 대회는 『동아일보』 주관으로 황학정에서 열렸는데,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를 계기로 궁술도의 확립을 촉구하고, 중앙기관의 단체설립의 필요성을 논하였다, 즉, “궁술이 무술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잃고 화류계의 부속품 노릇까지 할 정도로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을 통탄하고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를 계기로 중앙조직을 출범시킬 것을 촉구한다. 바로 말미의 ‘오인(吾人)은 국민성 교양의 기관으로서의 궁술도의 확립을 바라며 이번 기회에 무슨 중앙기관을 창설하여 궁인(弓人)이 통일한 기치 하에 서기를 바란다”고 조직의 필요성을 논하였다. 당시 대회를 주관한 단체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였다. 이에 이 대회를 계기로 1928년 ‘조선궁술연구회’가 발족하였다.

그림 8 조선궁도회에서 개최한 궁술대회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전통 궁술을 연구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조직이다. 이 연구회는 궁술의 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 철학적, 문화적 의미를 연구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 연구회에서 1929년에 발행한 『조선의 궁술』은 국문학자 이중화가 중심이 되어 집필하였다. 그리고 서울과 인천, 수원 등지의 오랜 역사를 가진 황학정과 석호정 등의 36명이 참여한 불세출의 명작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활의 기원과 역사, 활과 살의 종류, 활을 쏘는 기술 등을 망라하여 다루었다. 그러나 정작 궁술이란 용어의 역사와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조선의 궁술』(1929)은 분명 우리나라 전통활쏘기의 불세출의 명작이다. 하지만, 당시에 궁술이란 용어는 지금처럼 일반적인 용어가 아닌 일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단어였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선궁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의 궁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조선궁술연구회는 출범 4년만인 1932년 5월 제3회 전조선궁술대회를 개최한 이후에 명칭을 ’조선궁도회‘로 바꾸었다. 어떤 연유로 이름을 바꾸었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938년 1월 1일 『조선일보』의 ’묵은 조선의 새 향기‘란 대담에서 당시 황학정 사두를 역임하고 조선궁술연구회를 창설한 성문영옹의 이야기에서도 그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궁도90년사』(126쪽)에서 말하고 있다.

이미 1925년 『조선일보』에 ’제4회 조선연합궁도회‘라는 명칭으로 전주에서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또 1934년 5월 26일에 제목은 “우리의 무술정화 궁술대회”라고 하고, 내용 속에서는 주관기관을 ’조선궁도회‘라고 하였다. 이때가 궁술과 궁도의 공존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35년 이후로 궁도대회란 이름이 궁술대회라는 이름과 같이 많이 나온다.

4. 마무리

한국인들이 궁술이란 용어를 우리의 활쏘기의 용어로 사용한 1907년으로부터 불과 이십여 년 만인 1928년에 궁술이 우리 활쏘기의 대표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일부에서 궁도란 말에 대해서 일제의 잔재라고 터부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해, 궁술은 반감없이 우리의 용어로 스며들었다. 지금도 일부 개인이나 단체에서도 ‘궁술’이란 용어를 우리의 전통활쏘기 용어로 인식하여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궁술’이란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전통 활쏘기의 정수라거나, 협회 이름으로 궁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궁술이란 용어를 ‘전통’이나 ‘정통’이니 하는 말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는 있다는 점이다.

‘빵’과 ‘가방‘이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비슷하다. 빵은 포루투칼에서, 가방은 네덜란드에서 일본을 거쳐온 용어다. 우리는 궁술을 우리의 용어로 사용하는데 궁도와 달리 거리낌이 없었다. 왜 그럴까? 조선궁술연구회에서 결정했기 때문일까? 조선궁술연구회는 출범 4년만인 1932년 5월 제3회 전조선궁술대회를 개최한 이후에 명칭을 ’조선궁도회‘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 이유가 확실치 않다. 조선총독부가 1938년 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체육회를 비롯하여 전국의 각종 체육단체를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통합시킨 것보다 훨씬 전에 이미 궁도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 한, 현재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궁도협회는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궁도회는 다른 단체보다 뒤늦게 1940년 3월 30일 조선체육협회에 가맹했다.

궁술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정착한 용어이고, 궁도 역시 일본식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같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