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활쏘기 역사

1. 선사시대의 활쏘기

그림 1 Mandrin E. Lithic points.1 유로 센트(직경, 16.25mm)크기 비교

활쏘기는 인류 공동 공영의 문화유산임. 활과 화살은 생존을 위한 수렵의 도구였음.

활은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나타나는 사냥도구임. 2023년 프랑스 만드랭의 유적조사에서 인류가 최초로 활을 쏘기 시작한 건 5만4천 년 전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음(Kaure Metz, Jason E Leuts, Ludovic Slimak(2023). Bow-and-arrow, technology of the first modern humans in Europe 54,000 years ago at Mandrin. Science Advances, Vol. 9, No. 8.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adv.add4675.)

그림 2 제주 고산리유적 출토 화살촉 / 그림 3 반구천 암각화

활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활이 유기질로 제작되어 남아있는 유물이 부족하기 때문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석기의 양면을 떼어낸 화살촉이 곡성 오지리 유적과 익산 서두리 유적 및 광주 신총 유적지 그리고 동해 망상도 가곡유적에서도 화살촉이 출토되었음.

돌로 만든 화살촉은 1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되었음. 고산리 유적에서만 200점이 넘는 다량의 화살촉이 발견되었고, 한반도의 그 어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화살촉보다 다채로운 모양과 크기를 보여주고 있음.

그러한 신석기 시대의 그림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울산 울주군 반구천에 있는 암각화임. 7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너비 약 8m, 높이 약 5m의 바위벽에 새겨진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천 암각화(2025년 세계유산 등재)에 활쏘기 장면이 잘 나타남.

인물상해당 장면내용

전신상 쪼기
11.4×17.8cm
활을 겨눈 모습 표현됨

전신상 쪼기
15.6×18.5cm
활을 겨눈 모습 표현됨

전신상 쪼기
10.0×14.0cm
활을 겨눈 모습 표현됨

그림 4 암각화 속 활쏘기 장면 (세부) <반구천의 암각화 도면자료집> 최현숙(2023) 재 인용

2022년 울산시가 실시한 3D 정밀 스캔 결과를 바탕으로 반구천 암각화에 보이는 4개의 활쏘는 인물상의 크기를 11.4×17.8cm, 15.6×18.5cm, 10.0×14.0cm, 43.3×31.3cm라고 하고 분석하였음.

2. 부족국가시대의 활쏘기

문자가 있는 역사시대에도 활쏘기는 전쟁의 주요 수단이었고, 인재선발의 중요한 수단이었음.

고조선, 부여, 읍루(挹婁), 숙신(肅愼), 말갈(靺鞨), 예(濊) 및 마한, 진한, 변한 등 부족국가 시대는 활쏘기가 수렵과 전쟁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 고조선에서의 활쏘기와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부여, 읍루, 동예, 숙신 등에서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들이 중국의 사서에 많이 보임. 부족국가시대의 활과 화살은 각궁, 단궁, 맥궁 등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열전 읍루조에, “활의 길이는 4자인데 그 위력은 쇠뇌(노:弩)와 같다”.(其弓長四尺, 力如弩, 用楛, 長尺八寸, 靑石爲鏃, 古之肅愼氏之國也. 善射, 射人皆入.)고 하였고, 『진서(晉書)』 열전에 숙신은 일명 읍루라고도 하는데 “석자 다섯치의 단궁(檀弓)이 있다”(檀弓三尺五寸.)고 하였음. 지금의 원산지역에 살던 동예에 대해서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낙랑(樂浪)의 단궁이 그 지방에서 산출된다.”(樂浪檀弓出其地.)고 하였음. 물길(勿吉)은 말갈이라고도 하는데, 494년 고구려에 복속되었음. 『북사(北史)』 열전에, “모두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업으로 삼는다. 각궁의 길이는 3자이고 화살의 길이는 1자 2치”(人皆善射, 以射獵爲業. 角弓長三尺, 箭長尺二寸)라고 하였음.

3.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활쏘기

삼국시대는 신라의 건국(서기전 57년), 고구려의 건국(서기전 37년), 백제의 건국(서기전 18년)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멸망(660년), 고구려의 멸망(668년)까지의 약 700여년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는 AD 370년경 고구려 소수림왕, 백제 근초고왕, 신라 내물왕대 부족국가를 뛰어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후의 시기를 말함.

1) 고구려

고구려는 활을 잘 쏜다는 뜻의 주몽(朱夢)이 그 시조임. 매년 3월 3일이 되면 낙랑의 언덕에서 대규모의 수렵대회를 열었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설립한 경당(扃堂)은 활쏘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미혼의 자제들이 경당(扃堂)이라 부르는 곳에서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晝夜於此讀書習射).”고 함.

그림 5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수렵도는 5세기 사냥스포츠 상황에서 기마무사와 짐승들 사이에 형성되는 사냥터 특유의 쫓고 쫓기는 급박한 흐름과 역동성이 잘 표현되어 있음.

그림 6 덕흥리고분의 마사희도

한편 광개토대왕의 영락18년(409)이란 기년이 있는 덕흥리 고분의 수렵도에 ‘마사희(馬射戱)’ 그림이 있음. 이 그림의 맨 오른 편에는 ‘서원마사희(西園馬射戱)’라는 명문이 있고, 말을 탄 4명의 무사가 5개의 표적을 돌아가면서 쏘아 맞히고 있으며, ‘사희주기인(射戱主記人)’이 붓을 들고 이들의 성적을 기록하는 모습이 있음. 한 사람은 말을 달리면서 앞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몸을 돌려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배사(背射)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파르티아 왕조(BC 247년부터 AD 226년)가 로마군과 싸울 때, 즐겨 활용한 파르티안 사법(Parthian Shot)이라는 이름의 활쏘기 방법임.

2) 백제

그림 7 백제금동향로에 보이는 기사

백제의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에도 향로 상단에 말 탄 무사가 활을 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음. 말 탄 사람의 몸뿐 만 아니라 말의 머리도 함께 역방향으로 회전시키고 있어 소위 파르티안 샷이라는 배사법 자세를 취하고 있음. 백제에 관해서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고이왕 9년(242), “가을 7월에 서문(西門)으로 나아가 활쏘는 것을 보았고(秋七月, 出西門觀射.), 비류왕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대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연습하였다(秋八月, 築射䑓於宫西, 每以朔望習射)는 내용을 통해 국가적인 활쏘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음. 지금도 활터에서는 초하루에 실시하는 삭회(朔會)란 뜻의 월례회를 하는데, 그 시작으로 볼 수 있음.

3) 신라와 통일신라

그림 8 천전리 각석

『삼국사기』 잡지(雜誌)에 신라는 군대 조직이 23개가 있었는데, 21번째 부대를 이궁(二弓)이라고 하였음. 이궁은 “외궁(外弓)이라고도 하는데, 첫째는 한산주궁척(漢山州弓尺)으로 진덕왕 6년(652)에 설치하였고, 둘째는 하서주궁척(河西州弓尺)으로 진평왕 20년(598)에 설치하였으며, 옷깃인 금(衿)이 없다(二弓或云外弓. 一曰漢山州弓尺, 眞徳王六年置. 二曰河西州弓尺, 眞平王二十年置. 無衿.)”고 하여 활쏘기에 편한 옷을 입은 병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조선의 궁술』을 쓴 이중화(1929:15)는 궁척(弓尺)을 고어(古語)로 ‘활자’이니 즉 궁수의 뜻이라고 하였음.

울주 천전리 명문(銘文)과 암각화는 높이 2.7m, 넓이 9.7m의 경사진 돌 위에 선사시대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글이 남아 있는데, 이 암각화에 활쏘기를 하는 인물상이 보임. 화살대의 방향이 수평선을 이루고 깍지손이 수평을 이루고 있어 가까운 사냥감을 향해 활 쏘는 모습을 알 수 있음.

그림 9 신라시대의 쪽샘 44호분에서 출토된 토기의 기마행렬도

신라에서도 4~6세기 신라 귀족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쪽샘 44호 적석목곽 묘(돌무지덧널무덤)에서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특히 40cm크기의 목이 긴 항아리인 장경호(長頸壺)에서 기마행렬과 함께 활을 든 두 사람과, 그 앞에 사슴, 멧돼지, 호랑이 또는 개로 추정되는 동물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수렵 장면이 묘사되어 있음. 이중 중앙부에 활을 든 두 사람이 보이는데, 그 활은 각궁처럼 크기가 아주 작게 표현되어 있음.

그림 10 경주 수렵문전편(狩獵文塼片)

또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장면은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편(狩獵文塼片;사냥무늬전돌편)의 기마수렵도문(騎馬狩獵圖文)에서도 발견됨. 전돌 측면에 달아나는 사슴과 이를 쫓는 말 탄 무사의 모습을 새긴 것인데, 질주하는 말 위에서 활을 당기는 무사의 자세와 갈퀴가 휘날리는 말의 머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음.

4. 고려 시대의 활쏘기

고려시대에는 대외적으로 요·원·명·금·거란·여진·왜 등 주변국들과의 충돌과 대립이 있었고, 활쏘기는 전대와 같이 중요한 무예활동으로서 역할을 했으며, 제도화가 이루어졌음.

고려의 초기 군사제도는 2군6위로 이루어진 중앙군과 주현군으로 편성된 지방군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정규편제 외에 특별부대인 별호제반(別號諸班)를 편성하였는데, 그 속에 활과 노(弩)를 담당하는 경궁(梗弓) 사궁(射弓)·정노(精弩)·강노(剛弩) 등 특과병 부대가 있었으며, 또 5군(五軍)중에도 좌·우경궁(左·右梗弓) 도령(都領)이 있었음.

그림 11 『계림유사』에 보이는 활쏘기 (弓과 箭과 射)

숙종 8(1103)년 서장관으로서 사신을 수행하고 고려에 온 송나라의 손목(孫穆)이 쓴 견문록 『계림유사(鷄林類事)』에 ‘弓曰活, 射曰活索’(궁왈 활이라고 하고 사(射)왈 활쏘아)라고 표현하여 당시의 한글의 대략적인 음을 알수 있음.

고려에서는 각 주(州)와 진(鎭)에서 농한기에 매월 백관이 조회하여 임금에게 정무를 아뢰던 날인 육아일(六衙日)에 활과 쇠뇌를 연습하는데, 계관(界官)·행수원(行首員) 및 색원(色員)들로 하여금 친히 감독하게 하고, 활은 40보, 쇠뇌는 50보에 과녁을 설치하여 10번 쏘아 5번을 적중한 자 및 연속해서 적중한 자에게 직위를 주어 임용하였음(『高麗史』 志兵. 鎭戍 各州鎭, 於農隙, 每月六衙日, 習弓弩, 令界官行首員, 與色員親監. 弓四十步, 弩五十步, 置的, 十射五中者, 及連中者, 兩京職事員將, 則進祿年加轉, 散職東南班, 則內外職敘用, 人吏則從自願, 任其職事, 散職將相將校, 則進其年限加轉, 無職員, 則隨宜用之).

고려시대에 사용되던 궁시들은 삼국시대의 궁시를 기본으로 하면서 더욱 다양한 기능을 가진 활과 화살들로 발전되고 있음. 삼국시대에 보편화 되었던 각궁을 계승한 것 외에 의장용인 장엄궁(莊嚴弓), 그리고 세전(細箭) 발사에 사용한 세궁(細弓)이 기록에 나타남. 화살은 고시(楛矢), 죽전(竹箭), 세전(細箭), 유전(柳箭), 유엽전(柳葉箭), 대우전(大羽箭), 편전(片箭) 등 그 종류가 전대에 비하여 다양해짐.

5. 조선시대 활쏘기의 역사와 문화

세계 여러 민족의 활쏘기 중에 우리나라만의 특색있는 활쏘기의 역사와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무과와 양반사대부의 성리학적 덕목인 육예 중 사예(射藝)의 실천 그리고 대사례, 연사례의 설행을 통해 활쏘기를 국민계도를 위한 정치적 목적과 국가적 의례로 승화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음.

우리나라 활쏘기는 조선 시대에 편사와 같은 다양한 활쏘기 형식과 무사시취를 위해 군영과 궁정에 설치되었던 관설사정 그리고 무과 등과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꿨던 조선 젊은이들의 교습장인 민간의 사설사정이 중심이었음.

‘활쏘기’라는 한글 명칭은 우리의 활의 역사와 함께 하였음. 이에 대한 기록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1446년(세종28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쏘다’는 활을 쏘는 종류에 사용(爲射之之類)”이라는 구절이 나타나고, 1630년에 간행된 『여훈언해(女訓諺解)』에서도 “풍류며 활쏘며”라는 구절이 나타남.

그림 12 『훈민정음』 해례본(1446) 합자해에 나온 ‘활’과 ‘쏘다’

조선시대 활쏘기의 발달에 기여한 가장 큰 제도는 무과제도라고 할 수 있음. 무과는 문과와 아울러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국가적인 인재 선발 제도임. 무과는 조선 전기인 태종 2년(1402년)부터 시작되어 약 1세기의 정비 과정을 거치며 성종 16년(1485)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확립됨. 조선 영조 22년(1746년)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에도 무과의 시험과목이 정비됨.

그림 13 『속대전』에 보이는 무과 시험과목

그 후 무과는 고종 31년(1894년) 군사제도의 개혁과 아울러 폐지될 때까지 약 500년 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무인 선발 제도의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무려 800번의 무과시험이 있었음. 시험과목은 무예 시험 과목과 이론임. 실기는 조선 전기에는 목전(木箭, 240보), 철전(鐵箭, 80보), 편전(片箭, 130보이상)과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 6가지로서 활쏘기와 기마술이 주축을 이룸. 조선 중기에는 새로이 유엽전(柳葉箭, 120보), 관혁(貫革, 150보), 조총(鳥銃), 편추(鞭芻) 등 실기 4과목이 추가됨. 실제 시험에서는 왕이 지정하는 1~2기(技)만을 택하여 시험을 보았음.

그림 14 한시각(韓時覺)의『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지방에서도 이러한 무과시험이 실시되었음.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는 화원화가인 한시각(韓時覺, 1621-1691 이후)이 1664년(현종5) 함경도 길주목에서 실시된 문무과 과거 시험 장면을 그린 기록화임. 세로 57.9cm, 가로 674.1cm의 대형 그림임. 「길주목의 과거 시험(吉州科試圖)」에서는 칠보산(七寶山)을 비롯한 길주의 산들이 수평으로 줄지어 배경을 이루고, 타원형의 성곽 안쪽에 있는 관아 건물에서는 문과 시험이, 너른 마당에서는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과시험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음.

그림 15 대사례의궤에 보이는 왕이 활을 쏘는 장면

조선 왕조에서 활쏘기가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 대사례와 향사례임. 활쏘기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남자의 덕행을 수양하는 방법이며 심신을 단련하고 국가의 비상시를 대비하는 훈련 방법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짐. 국가에 행사가 있을 때 왕이 참석해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쏘는 것이 대사례였음. 대사례(大射禮)는 성종 8년인 1477년 처음 거행됨. 성균관에 나가 선성들에게 석전(釋奠)의 예를 드리고 명륜당에서 과거를 보인 뒤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했다는 기록이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 자세히 나옴.

향사례(鄕射禮)는 향음주례와 마찬가지로 고을의 유덕자를 존경하고 예양 읍손(禮讓揖遜)의 풍조를 이룩하기 위한 연중행사였음. 점필재 김종직이 42세(성종 3년 1472년)에 함양군수로 제수하였던 시기에 시작하였다고 함. 제도화된 향사례의 정착은 2년 뒤인 성종 5년(1474년)에 반행된 『오례의』에 나타남.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가운데 향사의는 군례(軍禮) 의식으로서 “매년 3월 3일(가을에는 9월 9일)에 개성부 및 여러 도·주·부·군·현에서 그 예를 행한다.”고 하였음.

조선시대에는 향사례와 관련하여 사계(射契)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음. 17세기에 들어 향사례는 점차 약화되었으나, 사계는 향사례의 역할이 사계로 옮겨가기 시작함. 조선시대의 사계 자료로는 충청도 강경의 덕유정계(德游亭契)와 전라도 영광의 남극재(南極齋), 영암의 열무정(閱武亭) 등의 사계 자료가 남아 있음. 현재도 일부 활터에는 아직도 사계의 유풍이 아직 남아 있음.

표 16 탐라순력도 중 활쏘기장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을 시켜 제작한 기록 화첩으로 제주목사 이형상(1653~1733)의 가을 순력과 제주도에서 치른 다양한 행사를 묘사하였음. 그림 41면과 서문 2면 등 총 43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속에 활쏘기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옴. 활쏘기 장면을 직접 묘사한 그림이 8점, 활쏘기와 관련된 시설물(솔포와 나무과녁)을 포함한 그림이 10점, 도합 18점의 그림이 활쏘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 「명월시사」, 「천연사후」, 「제주전최」, 「제주사회」라는 제목으로 활쏘는 장면을 잘 표현해주고 있음.

조선시대의 활쏘기는 김홍도의 활쏘기(사궁, 射弓)을 비롯하여 다양한 민속화에서 많이 나옴. 이 그림에서는 활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장정들과 군관의 얼굴 표정 및 몸놀림이 이채롭고, 활과 화살을 다루는 사람들의 모습도 잘 나타나 있음. 강희언(姜熙彦, 1738~1784)의 ‘사인사예도(士人射藝圖)’는 야외에서 선비들이 활 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속화임.

조선시대 활쏘기는 양반사대부들이 누정에 모여 시문을 짓고 활을 쏘는 풍류로서의 문화로 정착되었으며, 장안 세 구역의 한량들이 활쏘기 기량을 겨뤘던 장안편사는 가장 규모가 크고 볼만한 무사들의 놀이였음.

그림 17 김홍도 풍속도 화첩《檀園風俗圖帖》射弓

그림 18 강희언의 「사인사예도(士人射藝圖)」

그림 19 경기감영도 중 활쏘는 장면

18세기에 제작된 보물 제1349호 『경기감영도 12곡병(京畿監營圖十二曲屛)』에는 조선시대에 무과 시험과 군사훈련을 하던 모화관(慕華館)과 경기감영이 위치했던 역사적인 장소를 그리고 있는데, 이중에서 읍승정(揖升亭), 연향대(宴享臺), 사정(射亭), 천연정(天然亭), 칠송정(七松亭) 등에서 활쏘기를 하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음. 조선의 활쏘기 문화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활이 더는 군사 무기로서 역할을 상실하게 된 것과 갑오경장(1884)에 의한 과거제의 폐지와 군사제도의 개혁이었음.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원산, 부산, 인천 등에서 활동하였던 기산 김준근(金俊根)은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풍속화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판매하였는데, 그의 활쏘기 그림은 다수가 해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기산풍속도는 국내의 200여 점과 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덴마크,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캐나다, 미국 등 전 세계에 천여 점이 넘게 전시되어 있고, 활쏘기 그림이 다수 남아 있음. 그리고 그는 『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1895)이라는 책에 있는 그림도 그렸는데, 이 책에는 ‘편사하기(HPYENSAHAKI)’라는 항목이 있어 당시에도 우리의 활쏘기 풍습의 대표적인 놀이를 기록하고 있음.

그림 20 김준근의 활쏘기

개화기에는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의 활쏘기 기록을 남김. 미국인 George Clayton Polk라는 대리공사가 1885년에 찍은 북한산 연융대에서의 활쏘기 연습이란 사진을 남겼는데, 연융대는 북한산 아래쪽의 홍지문 뒤쪽 지역으로 오늘날 종로구 신영동 일대임.

그림 21 북한산 연융대에서 찍은 활쏘기(1885)

6. 근대이후의 활쏘기

1) 대한제국기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에서의 무과 폐지는 조선 젊은이들이 활 쏘기 수련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희망을 앗아가 버림으로써, 활쏘기에 대한 열정을 식게 한 결정적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사설사정의 폐쇄로 이어짐. 이러한 때에 고종은 당시 독일 동아함대 사령관 자격으로 국빈 방문한 하인리히(Prinz Heinrich) 왕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왕자는 조선의 고유무예를 보고 싶다는 왕자의 청에 의해 활쏘기를 보여줌. 독일 왕세자의 조선 전통 활쏘기 칭찬이 군사 효용부분과 연결되어 고종이 감명을 받아 다시금 궁술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음.

한 기록은 통역관 라인스도르프(L.W.F. Reinsdorf)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인리히 왕자가 방문하여 활쏘기를 본 곳은 서궐(西闕)이 아니라 당시에 북궐(北闕)이라 불리던 현재의 청와대 자리인 중일각(中日閣)이였음. 또 하인리히 왕자의 방문 시에 영접하였던 민영환(閔泳煥)과 이재순(李載純)을 주축으로 황학정 사계와 청룡정 사계가 부활되고, 고종이 내하전(來賀錢)을 후원하여 전통활터와 활터 조직이 활성화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음.

그림 22 1900년 3월 8일 황태자(훗날 순종)의 생일인 천추경절에 황학정 공식개정 사진

이에 1899년 가을 경희궁 북쪽 산록에 황학정을 신축하여 왕실과 고위관리들, 일반인들의 습사장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천추경절에 황학정이 공식개정한 사진이 남아있음.

고종은 황학정에서 주로 활을 쏟았고, 영선군과 의친왕 등의 왕실인사들은 황학정 외에도 취운정, 백호정, 이화정 등에서 활쏘기를 하여 전국 각지에서도 활쏘기 문화가 부흥하기 시작해 갑오개혁 이전 도성 내외의 사정이었던 청룡정, 석호정, 남덕정, 서호정, 일가정, 화수정, 무학정 등 약 8개의 사정이 부활됨. 이런 모습에서 근대화 시기의 활은 군인들의 전유물이 전투용이 아닌 체력단련의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고, 나아가 양반가들만의 전유물이였던 활은 대중의 스포츠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음.

1909년, 사궁회는 일제강점기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 한국의 전통 활쏘기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지식인들과 활쏘기 애호가들에 의해 창립되었음. 이 조직은 활쏘기를 중심으로 활동한 단체로, 지역별로 조직된 소규모 단체들로 이루어짐.

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 시기였던 1910년대를 한국 근대체육의 암흑기로 분류하지만, 활쏘기는 관덕회(觀德會)를 중심으로 조직화되고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음. 일제는 3.1운동 이후 강압적 탄압보다는 문화정책이라는 명분으로 통치의 방향성을 바꿈.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종 궁술 대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이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 5차례 뿐이었던 행사가 1920년대 들어와서는 한 해 동안 강경 궁술대회, 개성 궁술대회, 수원 궁술대회 등 3차례를 시작으로 1921년부터 28년까지 14, 25, 29차례로 지속적으로 늘어남.

그림 23 1928년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

당시 역사적 배경은 현대의 활쏘기 부흥에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문화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기여함.

그림 24 동아일보 1938년 10월 7일 기사

한편 1920년대에는 남자들의 궁술대회뿐 아니라 기생들의 활쏘기대회도 많이 열리기 시작하였으며 남녀궁술대회도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음. 특히 1938년 10월 7일 동아일보에는 “쏘아라! 가을의 창공(蒼空)을!”이라는 사진을 싣고 이화여전 학생의 섬섬옥수에 궁기부활(弓技復活) 운동으로 여성의 체위향상이라는 목적을 담아서 여성에게도 활쏘기가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기사를 싣고 있음.

그림 25 『조선의 궁술』

전국적으로 각 지역별 궁술대회가 열리고, 명실상부한 전조선궁술대회가 동아일보 주관으로 황학정에서 1928년 7월 14일부터 열림. 이후, 서울, 경기 지역 14개 사정 대표들이 황학정에 모여 발기를 하고, 1928년 조선궁술연구회를 창립함. 조선궁술연구회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전통 궁술을 연구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조직으로 전통 궁술의 기술적 측면뿐 만 아니라 그 철학적, 문화적 의미를 연구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임. 조선궁술연구회에서 국문학자 이중화의 『조선의 궁술』(1929)이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출간함.

7. 대한민국의 활쏘기

광복 이후 부활한 조선궁도협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인해 대한궁도협회로 개칭됨. 1954년 대한궁도협회의 대한체육회 가맹에 따라 활소기는 전국체육대회 ‘궁도’종목으로 채택됨.

한국은 1963년 일본과 대만의 추천으로 국제궁도연맹 회원국으로 가입함. 한국은 국제궁도 경기 참가를 위해 대한궁도협회 내에 양궁분과위원회를 개설하고 차경헌을 위원장으로 삼아 지도자와 선수 발굴에 나섬. 국궁과 양궁이란 용어는 이때 생겨난 것임. 1970년대 말에는 카본 등 합성섬유를 활용한 개량궁시가 등장하여 대중화의 가능성이 확대되고 스포츠로도 성장함. 궁도는 장비의 효율성을 높이고, 교육 프로그램과 홍보 활동을 통해 젊은 층의 관심을 이끌어내며 전통과 현대 스포츠로서의 요소를 결합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고 있음.

그림 26 대한궁도협회 홈페이지

대한궁도협회는 1983년 대한양궁협회(회장 정몽준)의 창립 시까지 전국 각 시도지부를 통해 양궁선수발굴과 육성에 힘을 쏟았음. 그 결과 1979년 경북 예천여자고등학교 김진호 선수가 제30회 베를린 국제궁도선수권대회에 출전, 여자부 전 종목을 석권하는 5관왕의 위업을 달성함. 대한민국이 43개(금메달 27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1위를 기록하고 있음. 특히 대한민국 여자 양궁 대표팀은 1988년 서울대회부터 2024 파리올림픽까지 올림픽 단체전 10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음.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과 2000년 초반 인터넷 보급 및 활성화 그리고 주5일 근무제 도입 등으로 인한 국민의 여가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증대는 새로운 세대의 활터유입으로 이어짐.

인터넷 국궁신문(2000년)과 온라인 동호회 형식의 국궁문화연구회(2000년), 온깍지궁사회(2001년)가 발족하였고, 2005년 한국국궁문화세계화협회(총재 연익모)가 창립됨.

장안편사놀이는 서울 도성 성내와 성외구역의 활터 간에 편을 갈라 활을 쏘는 성인남자놀이로 1994년 서울 육백년 기념행사로 황학정에서 장안편사놀이를 재현하였고, 그 역사와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서울시 무형유산으로 지정됨. 2025년에는 석호정에서 그 행사를 하였음.

그림 27 석호정에서 열린 장안편사놀이 대중회

대한궁도협회 속에 양궁종목이 있었기에 궁도는 ‘국궁’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리게 되었음.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이후 생활체육활성화란 이름으로 1994년 전국궁도연합회가 창설되어 궁도의 생활체육에 힘을 썼으며, 전국생활체육궁도연합회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세계민족궁대회라는 이름으로 세계 여러나라와 교류하면서 우리 궁도를 알리는데 힘을 썼음. 2025년에는 울산세계궁도대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였음.

2015년 육군사관학교장기 대학생국궁대회 개최는 대학 국궁동아리 활동이 정례화되는 계기로 작용함. 같은 해 대학 동아리 활동의 지원 및 활성화를 목적으로, 대학교수 중심의 국궁교수회가 창립됨.

2016년 국민생활체육 전국궁도연합회와 대한궁도협회의 통합에 따라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궁도협회’는 전국 17개 시도광역시 지부와 383개 사정을 관장하는 명실공히 한국 활쏘기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함.

2016년 7월 8일 서울대학교 체육관 303호에서 한국대학국궁연맹 발기인 대회를 개최함. 2017년 11월 11일 육군사관학교 생도회관에서는 한국궁도대학연맹 임시총회를 통해 한국궁도연맹 회장으로 나영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교수를 옹립함. 2018년 2월 2일 대한궁도협회 총회에서 한국궁도대학연맹 창립 최종 승인안 가결됨.

그림 28 사단법인 활쏘기문화보존회 창립

2019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국궁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타당성 조사용역을 발주함. 그리고 2020년 7월 30일 국가유산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활쏘기’를 인정한 데 이어서 2021년 2월 2일 사단법인 활쏘기문화보존회(회장 나영일) 설립을 인가함. 당시 코로나 상황이라 일부인원과 줌회의를 통해 회원들이 2021년 3월 20일에 서울대학교에서 활쏘기문화보존회의 창립식을 거행함.